질투의 화신. 문이주 기자

입력시간 : 2019-11-27 10:56:41 , 최종수정 : 2019-11-27 11:29:12, 문이주 기자



 조선시대 여자가 왕비나 세자빈이 된다는 것은 언뜻 부귀영화를 약속받는 듯 하나 실제로는 무덤 속으로 들어가는 것이나 다름없었다. 조선조 말기에는 안동김씨가 60년 동안 외척 세도정치를 했으나, 조선왕조 500년 동안외척이 세도를 누린 것은 지극히 짧고 말로는 좋지 않았다.

나라에서는 사대부들도 12첩을 거느리는 것이 당연시 되었다. 조선의 왕은 왕비 외에 후궁을 거느렸고, 승은을 기다리는 궁년가 500명이나 되었다. 왕비나 세자빈은 혼례를 올릴 때는 신데렐라가 되지만 시간이 흐르면 왕이나 세자에게 잊혀진 여인이 되어 외롭고 쓸쓸한 나날을 살아간다. 왕비의 후궁들 사이에는 치열한 암투가 벌어져 종종 비극적인 죽음을 맞이하는 일도 있다. 그러므로 왕비나 세자빈은 철장 속에 갇혀 우울한 시간을 보내야 했다.

세종의 장자 훗날 문종은 두 차례나 아버지 세종에 의해 세자빈이 폐출 당했다. 조선시대 최고의 성군 세종은 아들 부부 관계까지 간섭해 두 번이나 며느리를 쫓아냈다. 이것은 여인의 궁중 암투에 휘말렸기 때문이다.

 첫 번째 세자빈 김씨는 세자의 총애를 얻기 위해 대궐에 흉물을 들여와서 세종의 미움을 샀다. 세자빈은 국혼을 올린 지 2년도 되지 않을 무렵 뱀의 정액가루를 구하여 수건에 차고 다니는 기행을 벌였다. 세자를 미혹시키는 방법을 시녀 호초가 두 뱀이 교접할 때 흘리는 정액을 수건으로 닦아 차고 다니면 남자의 사랑을 받는다.’고 하여 시녀가 그것을 구해 세자빈에게 주었던 것이다.


그 꾀하는 것이 감히 요망하고 사특하니 왕궁 안에 용납할 수 없다 하여 세종이 폐출 시켰다.

두 번째 세자빈으로 지돈령부사 봉여의 딸 인데 동성애 사건으로 온 조정을 발칵 뒤집어 놓은 사건이다. 세종 17(1435) 구중궁궐에 칼바람이 무섭게 몰아치는 한 밤중, 세자빈 봉씨는 하얀 속저고리와 속치마 입고 앉아 주변의 궁녀를 모두 물리치고 소쌍이라는 궁녀를 불러 들였다. 궐내에는 세자빈이 술을 자주 마신다는 소문이 파다하게 퍼져 있었다.



세자빈은 소쌍에게 술을 권하고 소쌍은 마지못해 술에 취해 병풍 뒤로 들어가 불을 끄고 자리에 누었다. 그 날 이후 세자빈은 소쌍을 항상 옆에 두었다.

동성애의 기원은 소돔과 고모라에서도 이미 나타나 있었고 알랙산더 대왕도 동성애에 빠졌던 것으로 나타나 있다.

세자는 세자빈 봉씨를 찾지 않았다. 사이가 좋지 않다는 것을 안 세종은 세자에게 세자빈을 박대하지 말라고 영을 내리자, 비로소 세자는 봉씨의 침소를 찾았다. 그 후 세자빈은 태기가 있었다. 오랫동안 세손이 태어나지 않아 근심하는 차에 세종은 크게 기뻐하여 봉씨를 중궁전 교태전에 머물게 하였다. 그러나 한 달도 지나지 않아 세자빈은 유산을 했다고 하여 대궐에 난리가 났다.

세자빈은 다시 동궁전으로 돌아왔다. 세자는 다시 봉씨를 멀리하였고, 봉씨는 소쌍과 가깝게 지냈다. 세자빈 봉씨가 중궁전에 올라가 있는 동안 권승휘의 처소에 있는 사비(사가에서 데리고 온 여종) 단지와 가까이 지내고 있었다. 소쌍이 한 시라도 보이지 않으면 세자빈은 불안했다. 소쌍은 불안했다. 대식(원래 마주보고 식사를 하는 것으로 부부간을 뜻하는데, 궁인들의 동성애를 일컫는다.)은 은밀하고 남 몰래하는 것인데 세자빈 봉씨는 광포할 정도로 그녀에게 집착하고 있었다. 소쌍은 세자의 후궁인 권승휘의 가비 단지에게 하소연했다.

세자빈의 동성애가 단지에게 들어가면서 세자의 총애를 받은 권승휘가 세자에게 알리고, 궁중전의 나인에게도 은밀하게 알렸다. 쫓겨난 첫 번째 부인 김씨에게 측은지심을 갖고 있던 세자는 두 번째 부인까지 대궐에서 쫓아내고 싶지 않았다.

세종 때는 궁녀들의 대식은 폭넓게 퍼져있어 세종이 개탄까지 했다. 봉씨와 소쌍의 대식은 1년 동안이나 계속되어 결국 세종의 귀에 까지 들어가 이들을 심문하고 세종은 세자빈 봉씨를 책봉한지 4년만에 폐출시켰다. 병약한 세자는 세종의 눈치를 보느라 밤에도 학문에 전념할 뿐 세자빈의 처소를 찾지 않았다.


자신이 좋아하는 이성이 다른 이성을 좋아하는 것을 지나치게 시기하는 것은 당연히 있을 수 있는데, 질투는 조선시대에서 칠거지악의 하나이다. 왕실에서는 질투로 인해 결국 죽음으로 이어진 것이다


경찰신문 문이주 기자

.


Copyrights ⓒ 한국종합ART NEWS. 무단 전재 및 재배포금지 문이주기자 뉴스보기
기사공유처 : 경찰신문
댓글 0개 (1/1 페이지)
댓글등록- 개인정보를 유출하는 글의 게시를 삼가주세요.
등록된 댓글이 없습니다.